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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와 여행

대한민국 구석구석 - 문무대왕의 숨결 (경북 경주 감은사지-문무대왕릉)

by 레트로상회 2018. 6. 7.




주소 : 경북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55-3
전화 (054)-772-3843





감은사지는 경주에서 감포 바닷가로 향하는 해안내륙에 위치한다

산밑에 광대한 옛터만이 당시 규모를 짐작케 한다





감은사지에서 바닷가 문무대왕릉 까지는 약 7분 거리이다

경북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55-1

촬영장비 : 펜탁스 K-30 / 시그마(C) 18-300

2018년 5월 맑음





주차장에서 목책계단을 오르면 넓은 사찰터가 눈에 들어온다





사찰은 사라지고 당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옛터의 흔적만이 남았다





감은사지 입구 안내판의 해설문이다





문무왕의 구전설화 만파식적과 처용가의 전설을 담은 내용이

안내판에 만화로 소개되어 있다










이곳에는 풍채가 거대하고 위엄 있는 품새가 사람을 압도하는 삼층석탑 두 기가 나란히 서 있다.

통일신라 사찰의 전형인 쌍탑일금당의 가람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한 문무왕은 생전에 직접 대왕암의 위치를 잡고,

대왕암이 바라다보이는 용당산을 뒤로 하고 용담이 내려다보이는 명당에

절을 세워 불력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했다





삼국을 통일하고 당나라 세력까지 몰아낸 문무왕이었지만 당시 시시때때로 쳐들어와 성가시게 구는

왜구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이에 문무왕은 부처의 힘을 빌어 왜구를

막겠다는 생각으로 동해 바닷가에 절을 짓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절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왕위에 오른 지 21년 만에 세상을 떠나니, 신문왕이 그 뜻을 이어

이듬해(682년)에 절을 완공하여 감은사라 이름하였다. 이는 불심을 통한 호국이라는

부왕의 뜻을 이어받는 한편 부왕의 명복을 비는 효심의 발로였던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더욱 신빙성 있게 해주는 것은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들어놓았다는 금당밑의 공간이다.





























절터의 금당 앞 좌우에 서 있는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때 만들어진 것으로 현재 남아 있는 삼층석탑 중에서는 가장 큰 것이다.

대지에 굳건히 발을 붙이고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오른 두 탑은 크기로 보나 주위를 압도하는 위엄에 있어서나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멋진 탑이라 단정하는 데 이의가 없다.












감은사탑은 튼실한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을 올리고 지붕돌(옥개석)의 끝이 경사를 이루는,

통일신라 7세기 후반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감은사터는 사적 제31호로 지정되어 있다.














감은사지는 경주 보문단지에서 감포쪽 31.8km 거리이며 자동차로 40분 정도 소요된다.

여기서 문무대왕릉 까지는 약 7분정도 소요된다








경북 경주시 양북면(陽北面) 봉길리(奉吉里) 앞바다에 있는 신라 문무왕의 수중릉





감은사지에서 문무대왕릉 까지는 1.8km

자동차로 5분거리이다

(경북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30-1)





1967년 07월 24일사적 제158호로 지정되었다





대왕암()이라고도 한다.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왕()은 통일 후 불안정한 국가의 안위를 위해

죽어서도 국가를 지킬 뜻을 가졌다. 그리하여 지의법사()에게 유언으로, 자신의 시신()을

불식()에 따라 고문() 밖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국가를 평안하게 지키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유해를 육지에서 화장하여 동해의 대왕암 일대에 뿌리고 대석()에 장례를 치렀다.

사람들은 왕의 유언을 믿어 그 대석을 대왕암이라고 불렀다.












신라의 한 설화에, 문무왕이 그 아들 신문왕()에게 만파식적()이라는 피리를 주어,

문무왕이 죽은 후 바다의 용이 되었다가, 만파식적을 불면 용이 나타나

국가의 안위를 지키도록 하겠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