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상 기록실

궁정동 사람들 - 10.26 사태의 진실

by 레트로상회 2012. 9. 22.

 

 

 

10.26 사건은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당시 유신의 심장이자 권력의 핵심이던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총격을 가해 살해한 사건이다.  이는 7년동안 이어져 오던 유신체제에 종말을 가져옴과 동시에, 영원할 것 같았던 무소불위의 박정희 권력을
한번에 붕괴시켰던 일이다.  1972년부터 이어져 오던 유신 체제는 경제적으로는 급속한 성장의 후유증과 오일쇼크, 정치적으로는 장기집권과 초헌법적인 독재정치, 그리고 미국과의 관계악화로 흔들리고 있었다. 마침내, 유신 7년째인 1979년 10월 16일,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면서 (부마항쟁) 안그래도 점점 심각해지는 집권층 내부의 갈등이 이 시위의 처리문제로 인해 폭발하면서 종국엔 이러한 극단적인 사건까지 터지고 말았다.
 
1961년 5.16 쿠데타 때부터 박정희를 보좌했던 경호실장 차지철은 당시 실질적인 No.2였으며, 심지어 차기 대권을 넘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성장한 인물이었다. 차지철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을 부를 때 '김 부장'이라고 존칭 없이 부른 데다가,매사에 퉁명스럽고 건방진 태도로 그를 대해 김재규의 꼭지를 제대로 돌게 했다. (사실 중앙정보부장은 직급으로 따지면 경호실장보다 높은 직급이었으며, 게다가 차지철은 김재규의 육군사관학교 후배이다. 나이도 차지철이 더 어렸다... 이쯤되면 빡칠만 했을것이다...)
 
부마항쟁이 일어나자,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은 이를 김영삼, 김대중 등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의 방해공작으로 보고, 강경 진압과 대량 학살을 예고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위태위태한 나날들이 이어지다가...1979년 10월 26일. 당일 대통령 박정희는 충남 당진에서 열린 삽교천 방조제 완공식과 KBS 당진송신소 완공식에 참석한 후 오후 2시 반경 청와대로 복귀하였다. 그리고 그날 오후 4시 경, 차지철은 박정희로부터 대행사를 준비하라는 명을 받았고, 경호처장 정인형을 통해 중정 안가측에 대행사를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친구인 정인형에게 대행사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는 주방에 연회 준비를 지시하는 한편으로 대행사를 도울 여성을 섭외했는데, 이날 섭외된 여성은 당시 모델 겸 배우이던 신재순 가수 심수봉이었다.
 
(참고로, 대행사란... 대통령, 경호실장, 비서실장 등과 시중드는 여성(주로 연예인)들이 술자리를 같이 하는 것을 말한다...당시 '행사' 에는 소행사와 대행사가 있었는데, 소행사는 박정희와 시중드는 여성 단 둘이 술자리를 하는 것이라고....차지철과 권력 싸움에서 밀려난 데다 박정희의 눈 밖에 난 김재규 중.정 부장은 계속되는 스트레스와 분노에 살의를 느껴 급기야는 박정희와 차지철을 살해할 생각을 품기 시작했다. 오후 4시 10분 경, 궁정동 안가에서 대행사가 있다는 말을 들은 김재규는 궁정동에 도착한 후, 전화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중정 국내담당 차장보 김정섭을 "오늘 저녁 시국얘기나 하면서 간단히 식사나 하게 6시 30분까지 궁정동으로 오라" 고 초대했다. 그리고 김재규는 자신의 발터 PPK 권총에 총알 7발을 장전한 뒤 언제든 꺼낼 수 있게 책상 서랍 안에 넣어 두었다. 
 
오후 6시 경 박정희와 차지철 일행이 도착하자, 일치감치 40분 전부터 먼저 와 있던 김재규와 비서실장 김계원이 맞이했고, 궁정동 안가 B동으로 안내하면서 연회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대통령 수행차 안가로 온 청와대 경호실 직원 중 김용태 특수차량운행계장, 박상범 경호계장, 김용섭 경호관은 나동의 주방에서 안가 직원들과 같이 맥주를 곁들여 저녁을 먹었고, 정인형 경호처장과 안재송 부처장은 의전과장실에서 따로 저녁식사를 했다. 당시 중정 안가에서의 행사 시, 대통령 경호는 안가 경비원들에게 맡기고 경호원들은 별도 장소에서 식사를 하거나 휴식을 취하는 것이 일종의 관례였다.
 
한창 연회가 진행되는 중에, 박정희는 부마사태를 초기에 제대로 진압하지 못한 책임을 김재규에게 돌리며 질책하고 있었다. 게다가 옆에 있던 차지철마저 김재규에게 "중앙정보부장씩이나 하는 사람이 그런 일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 며 "나라의 정보부장이 그렇게 물러서 어떻게 하냐"고 거들었다. (나이도 어리고 심지어 육사 후배가 저렇게 빈정대며 깐다고 생각해보시길... 게다가 대통령까지 자기 편이 아니라니...) 이런 분위기는 6시 30분 쯤에 신재순과 심수봉이 시중을 들러 들어 올때 쯤 누그러졌지만, 김재규의 꼭지는 이미 돌 대로 돈 상태였다.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잠깐 어디 갔다 올 데가 있다" 며 자리를 비워, 궁정동 A동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있던 정승화 참모총장과 김정섭 차장보에게 가서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불러서 자리를 비우게 됐다, 잠시 후에 올테니 기다려 달라" 며 해명을 하고,자신의 집무실 책상에서 장전된 발터 권총을 꺼내 바지춤에 숨겨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자신의 심복이던 박선호와 박흥주 대령을 불러 "곧 각하와 차지철을 해치울 거다. 총소리가 나면 그것을 신호로 경호원을 처치하고 합류하자" 라며 '일방적으로' 명령했다. 박선호와 박흥주는 깜짝 놀랐지만 이내 알아듣고 명령을 성실히 수행했으며, 안가 경호원들을 몇명 더 끌어들여 좀더 완벽한 실행을 위해 노력했다. 박흥주와 그가 끌어들인 안가 경호원 두명은 M-16으로 무장하고 승용차들 사이에 숨어 총소리가 나길 기다렸고, 박선호는 경호원실에서 고스톱을 치며 노가리를 까던 해병대 동기 정인형과 안재송을 처리할 준비를 했다.

 

 


 
7시 40분 경,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간 김재규는 박선호에게 "준비가 되었다" 라는 말을 듣고, "차지철 이 새끼, 넌 너무 건방져!" 라는 말과 함께 권총을 꺼내들어 차지철의 손목에 관통상을 입혔다. 그러자 "이게 뭐하는 짓이냐" 는 박정희의 일갈이 떨어졌고, 3~4초 뒤 김재규는 제 2발을 박정희의 왼쪽 가슴에 발사했다. 세 번째 총알을 차지철에게 쏘려는 순간, 발터 권총에서 격발 불량을 일으켰고, 차지철은 그 틈을 노려 실내 화장실로 대피했다. (대통령 경호실장이라는 작자가 대통령이 암살당하게 생겼는데~지 혼자 살겠다고 튀었다...) 
 
총소리가 나자, 박선호와 박흥주, 그리고 안가 경호원인 이기주와 유성옥은 식사를 하고 있던 대통령 경호원들을 처치하고, 김재규와 합류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차지철에게 쏠 세번째 총알이 격발불량을 일으킨 김재규는 안가 로비로 달려나가 박선호의 리볼버 권총을 넘겨받아 다시 연회실로 들어왔다. 그때 "경호원 어딨어!!! 경호원!!!"을 외치던 차지철과 맞닥뜨리게 되고, 차지철은 완강히 저항했으나 김재규의 총격에 맞아 치명상을 입었다. 차지철을 쓰러뜨린 김재규는 박정희의 뒷통수에 격발함으로써 그를 확인사살하였다.
 
일을 마친 김재규는 복도에서 벌벌 떨고 있던 비서실장 김계원 (김재규와 형님 동생 하는 사이로 같이 차지철 뒷담까면서 동병상련하는 처지) 에게 "나는 한다면 한다. 형님은 뒷처리를 해주시오" 라며 당부하고 연회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정승화 총장과 김정섭 차장보가 있던 방으로 가 "지금 큰일났다"며 그 둘을 자기 차로 데려갔다. 김재규는 자기 차에 탄 정승화와 김정섭에게 "각하가 돌아가셨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정승화는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이내 안정을 찾고 남산(중앙정보부)으로 갈지 육본으로 갈지 우왕좌왕 하던 김재규에게 병력동원 차원에서 용산 육군 본부로 가는 것이 좋다고 권유했다. 이에 김재규는 정승화의 의견을 받아들여 육본으로 차를 돌렸다.
 
이는 김재규의 가장 큰 실책이었으며, 김재규를 파멸로 몰고 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7년동안 온갖 조작과 은폐를 일삼은 중앙정보부가 아닌, 자신이 전혀 힘을 못쓰는 육본으로....만약 김재규가 중앙정보부로 가서 '궁정동에서 차지철이 박정희의 가슴과 뒤통수를 쏴 사살하고, 자신이 차지철을 막는 과정에서 차지철에게 총상을 입혀 그를 사살했다' 라고 거짓 증언을 했으면, 김재규는 적어도 좃망테크를 타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쨋거나 육본 대회의실에서 열린 비상국무회의에서 김재규는 "각하가 유고상태이니 빨리 계엄령을 선포해달라. 김일성이 알면 큰일난다" 며 길길이 뛰었다. (예나 지금이나 걸핏하면 북한 팔아먹는건 여전하네...ㅋㅋ) 처음에는 정부 각료들이 김재규에게 압도당해 우물쭈물하며 어쩔 줄을 몰라했는데, 뒤늦게 도착한 고향 선배인 부총리 신현확이 "상황도 설명 안하고 계엄령이 웬말이냐" 며 호통을 치자, 별 논리도 없고 둘러댈 말도 없던 김재규는 버로우를 탔다. 
 
박정희를 국군수도병원에 안치하고 돌아온 김계원이 정승화 참모총장과 최규하 국무총리에게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보고하고, 정승화가 체포명령을 내려 김재규가 전두환의 보안사령부 취조실로 끌려감으로써 거사는 당일치기로 쫑나고 말았다...사건 이후 헌법에 의해 최규하 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고, 비상계엄이 선포되어 정승화가 계엄사령관을 맡았으며, 평소 정승화가 믿음직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정승화의 추천으로 10.26사태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게 되었다. (이건 정승화의 최대 실책... 제 무덤을 판 꼴이다...)

 

김재규는 내란음모죄로 사형판결이 나고, 박선호와 박흥주를 비롯한 암살조 전원도 역시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다... 당시 박정희 밑 실세 권력의 삼각점 중 둘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경호실장 차지철이 한꺼번에 사라지자, 실세는 보안사령관 전두환에게 집중되고 말았다... 그리고..급기야 전두환은 하극상 반란을 일으켜 자신의 최고상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체포한다. 이로서 전두환은 12.12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강제로 정권을 잡은후, 제5공화국을 출범시킨다. [수많은 광주항쟁속에 죽어간 자들의 피를 묻히고서~~~~~~~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