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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기록실

추억의 명승부 - 김일 VS 안토니오 이노키 [기타 경기]

by 레트로상회 2012. 10. 4.

 

 

 

1974년 10월 10일, 도쿄 국기관에서 개최된 김일과 이노키의 NWA 세계 헤비급 선수권 대결 [시간무제한-단판승부제]. 김일을 떠올리면 숙적이었던 안토니오 이노키를 함께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역도산의 제자였던 두 사람은 한국과 일본이라는 두 국가간의 경쟁심과 적개심의 대리자가 되어 부지런히 싸웠다. 둘이 맞붙은 건 38차례였고 김일이 9승1패28무승부로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김일과 안토니오 이노키 이 두 사람은 74년 10월 10일 자신들이 속한 양 단체의 명운을 걸고 경기를 펼치게 된다.

어느새 레슬러로써 확고한 자리를 잡았을 뿐만 아니라, 레슬링의 본 고장인 미국의 3대 헤비급 타이틀 중 하나인 NWA 챔피언 밸트를 거머쥘 정도로 급성장한 이노끼를 상대로 김일이 정식 타이틀 도전장을 내민다.챔피언 이노키에게는 NWA 6차 방어전이였다. 그날 경기에서 김일은 이노키의 장기인 코브라 트위스트에 걸려 경기 시작 13분 13초 만에 허리 통증을 참지 못해 항복했다. 이노키는 데뷔 후 한 번도 이겨 보지 못했던 김일을 처음으로 꺾었던 것이다..

 

 

 

이후 이노키가 이끄는 신일본레슬링은 아사히TV와 정규 방송 계약을 맺는 등 승승장구하게 된다. 김일이 분투하던 일본프로레슬링은 급격한 몰락을 맞는다.둘은 이듬해 75년 한국의 장충체육관과 도쿄에서 경기를 했다. 두 번 모두 `링 아웃`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이후 둘이 링에서 맞붙은 적은 한 번도 없다.. 이노키는 76년 2월에는 유도 세계 챔피언 윌리엄 르스카와 싸워 이겼고, 그해 6월 프로복싱 세계 헤비급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와 맞붙어 졸전이긴 했지만 무승부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노키는 89년 참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인이 된다. 그해 4월 소련(당시) 당국과 제휴해 토쿄 돔에서 일.미.소 레슬링 대회를 연 것이 계기였다. 대회 3개월 뒤 스포츠평화당을 결성해 출마한 것이다. 이듬해 그는 걸프전 이라크 인질 석방 운동에 참여했고, 캄보디아.소말리아.모잠비크 파병 등에도 목소리를 냈다. 95년에는 북한 당국과 평양에서 문화.체육축전을 공동 주최했다.


98년 4월 토쿄 돔에서 프로 레슬러 인생 38년 은퇴식을 하면서 그는 `세계 격투기연맹` 구상을 발표했다. 이후 프로듀서.프로모터 자격으로 연맹을 이끌고 있다. 그는 은퇴사에서 이런 말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사람은 걸음을 멈추었을 때, 도전을 그만두었을 때 늙어가는 겁니다. 이 길로 나아가면 어떻게 될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걱정하면 길은 없습니다. 일단 한 발 내디디면,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길이 될 것입니다."

 

 

 

아래는 김일과 자이언트 바바의 타이틀전

 

그리고 김일.이노키와 함께 역도산 문하 1기생으로 꼽히는 선수가 지금은 고인이 된 자이언트 바바(99년 1월 사망)다. 세사람은 도쿄의 역도산체육관에서 10년간 한솥밥을 먹으며 1970년대 초반까지 세계 레슬링계를 주름잡았다. 나카타에서 태어난 바바는 레슬링 입문 전 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투수였다. 김일보다 열 살 아래로 `자이안트`라는 이름만큼이나 체격도 컸다. 키가 208㎝인데다 발도 워낙 커 16문(384㎜)짜리 신발을 신었다. 그 큰 발을 이용한 '16문 킥'은 공포의 주무기였다.그 킥 때문에 상대 선수들은 곤혹을 치렀다.

 

 

김일 vs 압둘라부쳐 와의 장외 혈투전  [아래-경기 동영상]

 


 

거대한 몸집에 마른 체형이지만 이노키와 라이벌 구도로 일본 레슬링계의 전설이었고 '신일본 레슬링'에 대항하는 '전일본 레슬링' 단체의 창시자로 정통파 레슬링을 구사하는 실력파 오대천왕(미사와. 카와다. 타우에. 아키야마. 코바시)을 중심으로 정통성에 기반한 경기를 주로 하여 명경기들이 많았다. 바바와 이노키 두 사람 모두 전설적인 역도산의 영향을 받아 일본 뿐만 아니라 세계 프로레슬링을 호령했던 명선수들이다.※ 자이언트 바바가 키워낸 자이언트 바바의 뒤를 이은 선수로는 유명한 미사와 미츠하루(三澤光晴)가 있었다.1981년 프로레슬링에 데뷔해 제2대 타이거 마스크로 활동하며 프로레슬링의 간판스타로 큰 인기를 얻었다.또한 일본 최고의 타이틀이였던 3관왕 선수권자의 최다 타이틀 보유자였다. 그는 자이언트 바바가 이끌던 전일본 프로레스링 단체 소속이였으나 99년 바바가 죽고난후 2000년 바바의 부인 미사와 모토코와의 내부분쟁등으로 새로운 일본 프로레스링 단체인 Noah을 설립하고 사장겸 선수로 활동하게 됐는데 2009년 6월 13일 경기도중 상대 선수인 사이토 아키토시의 백드롭 기술을 잘못 맞아 링 위에서 사망했다.이때 나이가 46세였다. 김일,바바,이노키..셋 가운데 누가 가장 강했을까. 속칭 `시멘트 매치`(상대가 항복할 때까지 싸우는 무제한 경기)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경기에서 바바가 이노키한테 이겼다. 김일은 둘 다 잡았다. 결국 김일이 가장 강했다고 볼 수 있다.

 

 

 

 

김일의 약력

 

1929년:일제식민지 시대 - 전남 고흥 거금도 출생 하여 1956년(28세):일본으로 밀항, 체포돼 1년간 투옥후, 1957년(29세):역도산체육관(동경)문하생 1기로 입문하면서 레슬링을 시작함. 1958년(30세):일본 프로 레슬링 데뷔 / 1963년(35세):스승 역도산이 괴한의 흉기에 찔려 사망함.
1963년 12월:WWA 세계 태그 챔피언(L.A) /1964년 4월:노스 아메리카 태그 챔피언(텍사스 아모레로) /1964년 5월:록키 마운틴 챔피언(텍사스)
1964년 10월:NWA 세계 헤비급 타이틀 도전권 리그전 우승(텍사스) /1965년 6월(37세):영구 귀국 (1965년 4월 귀국 직전:미국에서 킬러 카부콕스,루 테즈와 경기했으나 모두 반칙으로 패배당함) /1965년 8월:극동 헤비급 챔피언(서울) /1966년 2월:올 아시아 태그 챔피언(동경)
1967년 4월(39세):WWA 제23대 세계 헤비급 챔피언(연맹공식기록) / 1968년 11월:올 아시아 헤비급 챔피언(서울) /1972년 12월(44세):인터내셔날 세계 헤비급 챔피언 / 1994년 4월:국민훈장 석류장 수상 / 1995년 4월(67세):일본 신문사 기자단 주최 도쿄돔에서 일본 무대 공식 은퇴식 거행(약 6만명의 관중 운집) /2000년 3월(72세):장충체육관에서 국내무대 은퇴식 거행(문광부, 체육진흥공단, 대한체육회후원),체육훈장 맹호장 수상. / 2006년 10월 26일(78세):타계(신기하게도 김일이 가장 존경한다는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같은 날자에 타계) 2006년 10월 28일:체육훈장 청룡장 추서.

 


 

 자료출처 : 디지탈 유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