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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와 여행

대한민국 구석구석 - 경북 영덕 신돌석장군 유적기념관 방문

by 레트로상회 2012. 11. 25.

 

 2012년 9월 10일 탐방 : 촬영 (파나소닉 DMC-ZS3)

 

 

 

 

한국독립운동사의 첫머리를 장식한 의병항쟁에서 신돌석장군은 18세의 나이로 참전하였고, (1906.4.~1908.12)  3년 8개월 동안 영릉의진을 이끌고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일본군들은 그를 태백산호랑이라 칭하며 무서워했는데,이토록 용맹하고 나라를 위해 몸바친 신돌석장군을 기리기 위하여 보훈처와 영덕군에서 그의 고향인 이곳 영덕에다 유적기념관을 조성한 것이다. 신돌석장군은 평민의 신분으로 장군에 오른 영덕의 의병장으로 강원도, 안동, 영해, 울진, 청송을 넘나드는 전투에서 혁혁한 전승을 올리며 일본놈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으나, 1908년 11월 18일 의병 재전열을 위해 고향에 들렀다가 현상금에 눈이먼 고향의 부하에게 살해되어 31살의 꽃다운 나이에 역사속으로 잠들었다.  신돌석장군 유적지 주소 : 경북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산 65 - 5번지

 

 

 

 

신돌석 장군 유적지 : 신돌석 장군은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본명은 태호(泰浩)이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일본군의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살해 사건과 단발령(斷髮令)으로 국민들의 대일 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 결과 전국 각지에서 의병항쟁이 발발하였다. 이 때 신돌석은 19세의 젊은 나이로 1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경상북도 영해(寧海)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1896). 1905년에는 국가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늑)약’(乙巳條約 / 乙巳勒約 양국의 평등한 조약이 아니라 일본이 강제로 체결한 조약임을 뜻함)을 체결하자 또다시 각지에서 의병항쟁이 발발하였다. 이 때 신돌석도 평민의 신분으로 의병을 모아 애국적 의분을 대일항쟁으로 쏟았다.

 

 

 

 

 

 

처음에는 의병 100명을 모아 영릉의병장(寧陵義兵長)의 이름으로 출발하였다(1906). 4월에는 울진 장흥관에서 일본군선 9척을 파괴하고, 6월에는 원주에서 일본군들을 습격하였다. 이어서 삼척, 강릉, 양양, 간성 등지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였고, 그들이 전선을 가설하는 작업을 공격하여 방해하기도 하였다. 1907년에는 울진 수동으로 돌아와 다시 의병을 증모하였고, 그 병력으로 영덕의 관공서를 습격하였다. 또한 일본군이 청송에 집결해 있을 때 이를 공격하기 위해 의병을 가까운 청부역으로 진군시켰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주민들은 의병을 자청하여 약 3,000여 명이 증가하였다. 일본군이 강력한 의병 소식에 영양의 주곡(注谷)으로 퇴각하자 이를 공격하여 격퇴시켰다. 진보(眞寶)의 삼위(三危)에서 적을 격파하였다. 경주의 대산성(垈山城)에서 연일 대일 전투를 벌였고, 청하로부터 조현(鳥峴)에 이르러서도 적과 싸워 이겼다. 그리고 소항을 지나 대동(大洞)으로 진출하였다. 10월에는 영해경무서를 습격하였다.

 

 

 

 

 

전국의 의병은 서울을 공격하기 위해 이인영(李麟榮)을 중심으로 13도 의병이 연합하여 양주(陽州)에 집결하였다(1907. 12). 신돌석도 경상도 의병을 대표하여 의병 1,000여 명을 모아 양주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의병 재편 과정에서 신돌석은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제외되었다. 당시 의병은 양반이나 유생 출신이 주로 지휘하였기 때문이었다. 전국 의병연합은 계획과 지도력의 미흡으로 서울 공격을 성사시키지 못하고 해산되었다.

 

 

 

 

신돌석은 경상도 영해로 돌아와 평해의 독곡(獨谷)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1908. 1). 1908년 3월에는 수비(首比)로 돌아와 안동, 울진, 삼척, 강릉 등지의 의병과 결합하여 의병세력을 강화하고, 춘양, 황지, 소봉동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그 후에도 평해 한곡에서(7월), 희암(9월)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10월까지 진지를 이동하면서 활약한 후, 겨울이 되어 다음해에 다시 기병하기로 하고 의병들을 귀가시키고 눌곡(訥谷)에 있는 부하 의병인 김상열(金相烈)의 집에 칩거하고 있었는데, 이들 형제들이 모의하여 그만 신돌석을 타살하고 말았다(1908).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신돌석 장군 유적지[ 申乭石 將軍 遺跡地]는 신돌석이 태어난 생가로부터 2.3km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으며, 부지 약 1만 6000㎡ 규모에 사당인 충의사를 비롯해 동재·서재·외삼문·내삼문·기념관 등이 들어서 있고, 기념관 앞마당에는 의병대장 신공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영덕군과 국가보훈처에서 장군의 애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탄생지인 이곳을 성영화 하기로 결정하고 1996년 12월부터 1999년 11월까지 사당1동, 동재와 서재 각1동, 기념관 1동을 세웠다.

 

 

 

 

 

 

 

 

누(樓)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잊고 / 낙목이 가로놓인 조국을 탄식하네 / 남아 27세에 이룬 일이 무엇인가 / 문뜩 가을바람이 부니 감개만 이는구나.

-1905년 선생이 평해 월송정에 올라 읊은 시-

 

 

 

신돌석 장군이 직접 지으신 시문의 원본을 대리석에 세겼다.  -1905년 선생이 평해 월송정에 올라 읊은 시- 계단을 오르면 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의사가 있다.

 

 

 

 

의병은 보통 사회적 지도 계급인 유생 양반출신이 대부분이었다. 평민이 의병을 지휘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신돌석은 지도력이 훌륭하고 농민들과의 대화가 잘되었으며 민폐를 끼치지 않아 여러 곳에서 호응하는 자가 많았다. 또한 전술이 뛰어나 일본군을 여러 방법으로 공격하여 피해를 많이 주어 전과를 많이 올렸다. 그리하여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평민출신의 의병장으로서 국가의 위기를 구하려는 큰 활약을 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신분차별 의식 때문에 의병의 연합전선 형성 과정에서 화합하지 못한 것은 국난의 역사 속에서도 개방적이지 못했던 아쉬움을 남겼다.

 

 

 

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의사 마당이다. 깔끔한 잔디와 넓은 대지위에 조성된 유적기념관은 장군의 기를 받기에 충분한 경견함과 위용이 느겨진다.

 

 

 

 

 

 

 

 

 

 

 

 

 

의병대장신공 유허비 :  이 비는 장군의 동생인 신태범이 각지에서 모금하여 1948년 경북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528 에 건립한것을 이곳 유적지 성역화 지역으로 1999년 11월 18일에 이전하였다.

 

 

충의사당에 모셔진 신돌석장군의 제향 영전이다. 호피옷에 검을잡은 위용이 사뭇 엄숙하다. 잠시 머리숙여 명복을 기리는 동안 심한 꾸짖음이 들리는듯 송구했다.

 

 

 

 

 

 

 

 

 

 

 

 

 

 

 

 

 

 

 

 

신돌석장군 생가에서 촬영된 대구 TBC 특집 [꺼지지 않는 들불-영해 동학농민항쟁] 다큐 - 2012년 11월 22일 방송.

[본 다큐 드라마는 필자가 신돌석장군 생가를 방문한 2012년 9월 10일 현장에서 촬영 되었다]